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한국의 범죄율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보기는 1%, 2%, 10%였고,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학생이 10%에 손을 들었다. 당시의 정답은 2%였다. 언론이 늘 사건사고 이야기만 하고 있어 범죄율이 높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로 많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범죄율이라는 게 피해자가 체감하는 정도와는 다르다. 가해나 피해 상황을 겪지 않은 사람은 2%가 그리 높지 않다고 여길 수치일지 모르나, 피해자는 일단 범죄를 당했으면 그게 100명 가운데 2명이 당했어도 나에게는 100%다. 내가 돌아올 때, 한국은 엽총 살인 등 불안한 사건이 많았다. 그렇다고 유럽이 안전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는 테러 위협이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테러가 일어났으며 내가 가지는 않았지만 덴마크에서도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한국이 범죄율은 낮을지 몰라도 세월호를 비롯, 여러 사건을 겪은 한국이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외국보다 한국에서 안정감을 느낀 것은 언어능력 탓이다. 나는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고 길 곳곳에 선 표지판은 익숙하다. 여행이 흰 도화지에 정보로 지도를 채워가는 것이라면 귀국은 이미 채워진 지도를 이용하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곳에 산다는 것은 꽤나 편리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외국에 있을 때보다 대처하기가 쉽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오니 팍팍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뭘 해야할지 모를 막막함도 여전했다. 유럽에서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사실 꽤 힘들었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 비우고 왔냐는 질문도 받았지만, 빈 것은 내 마음보다는 통장 잔고였다.

 

일전에 언급한 노르웨이전 파업의 여파는 네덜란드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네덜란드까지 가는 티켓을 35유로에 구입했다. 이 비행편이 파업으로 취소되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날로 티켓을 변경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취소 후 재결제 처리가 되었다. 즉 35유로에 결제했던 항공권은 비행이 취소되었으므로 취소 및 환불 처리가 되었지만 다음날 네덜란드행 티켓은 새로 예약한 것으로 처리했는데 이 비용이 250유로에 달했다.

 

이에 대해 카드사에 물어봤더니 항공사에서는 가승인이라는 것을 낸다고 한다. 이를테면 항공사에서는 고객의 신용카드 정보를 잡아두고, 문제가 있을 경우 서비스가 완료된 후 그 카드로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카드결제를 할 때,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결제 승인이 나지 않았다. 나는 노르웨이전 카운터에서 티켓을 교환할 때 직원에게 카드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았던 데다가 파업으로 결항되어 티켓을 변경한 것은 당연히 항공사가 비용에 대한 책임을 전부 질 줄 알았다.

 

노르웨이전은 자사 사이트를 통해 당시 파업에 대한 피해 보상 신청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 나도 접수를 했는데 접수하고 두 달이 지나서야 첫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항공사에서는 숙식비 등 파업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 내역을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카드사에 연락해 당시의 승인 내역서를 요청했다. 내역서를 받아보고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내가 이 비행기를 타고 한 주가 지나서 당초 결제한 35유로는 취소되었고 새로 250유로가 결제된 것이다. 이 문제로 카드사에 연락했더니 항공사의 과실을 직접 인정하는 문건을 받아 제출하면 카드사 측에서 승인 취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어쨌든 카드 승인 내역서를 받아 노르웨이전에 보냈더니 카드 승인 내역이나 은행 거래 내역이 아닌 당시에 현지에서 받은 영수증을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이 기간의 영수증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수증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버렸다. 여행 중이던 내게 영수증은 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슬로 가더모엔 공항의 회전초밥은 접시당 만 원 가까이 되었지만 갑자기 청구된 항공료 250유로에 비하면 훨씬 적은 금액이었다. 숙박비는 공항에서 먹었던 회전초밥 네 접시 가격보다 훨씬 저렴했다. 처음에는 어그러진 일정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며 시작했는데 어느새 초점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간 250유로에 맞춰졌다. 그래서 노르웨이전의 담당자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이 내용을 수차례 중점적으로 피력했다. 영수증이 없어서 당시 구입했던 음식 사진이나 숙소 사진 등을 첨부해서 보냈다. 당연히 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내왔고 이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면 내가 꽤나 처절해져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예기치 않게 오슬로에서 하루 더 머물면서 숙소며 음식 등을 저렴한 것들로 찾았다. 하지만 보상 청구과정을 보면 모든 게 실수였다. 이처럼 유럽에서 항공사의 사정으로 비행이 미뤄지거나 예정이 변경될 경우 항공사는 이로 인해 발생한 숙식비를 모두 제공할 의무가 있다. 즉 가격이 비싼 숙소를 선택해도 그에 대한 영수증만 있으면 그에 대한 비용을 모두 제공해야 한다. 나는 오히려 항공권은 보상을 받아도 숙식비에 대한 보상은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계산이 틀렸다. EU Regulation 261/2004에 따라 최초 내가 지불한 항공권 비용 35유로는 환불해주는 대신 다음날로 변경한 250유로에 달하는 항공권 비용은 재예약 처리로 인해 고스란히 내가 지불해야 하며 숙식비는 영수증이 있는 경우에 한해 항공사가 전액을 지원한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오슬로의 일정이 하루 연장된 것이 부담스러워 숙식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노력했다. 혹시 누군가 비슷한 경우를 겪는다면 나와 반대로 숙식비 지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좋다. 항공권은 변경하는 시점에서 새로 결제 청구가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번에 노르웨이전과 넉 달여간 수십 통의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990 노르웨이크로네를 보상받기로 했는데 이는 재결제한 항공권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조차도 은행간의 처리 절차나 해외 계좌 입금 등의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

 

35일간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녔다. 핀란드의 헬싱키, 스웨덴의 스톡홀름, 노르웨이의 오슬로, 베르겐, 보스, 플롬, 뮈르달, 아이슬란드의 케플라비크와 레이캬비크,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의 스키폴 공항까지. 플롬은 눈 덮인 하얀 산이 둘려쳐진 가운데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로 내가 시인이 아니라는 게 안타까울 만큼 아름다웠다. 헬싱키는 늘 편하고 즐거웠다. 케플라비크는 눈 덮인 길을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시리도록 깨끗한 대서양과 맞닿아 그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로마는 음식만으로도 추앙받아 마땅한 곳이었다. 오슬로에서 만난 여러 나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유라는 단어로 네덜란드를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못 갔지만 나중에라도 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노르웨이에서는 고물가에 치여 순간순간을 견디는 게 고역이었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 가장 기억에 남고 다시 가고 싶은 나라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써야했던 영어가 조금씩 잊힌다. 귀국한 이후에도 내가 이용했던 항공사며 숙소에서 자꾸 여행을 부추기는 메일을 보낸다. 여행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런 메일을 받으면 어차피 못 가는데 약이 오르기도 한다. 내가 다녀와서 한국이 그대로였던 것처럼 그들도 그대로 있으리라고 믿는다. 여행 안내 메일에 시선을 빼앗겨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통장 잔고가 늘 즈음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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